건축가로서 오랜 시간 주거 공간을 연구하고 직접 살아보며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반드시 좋은 공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의 아파트는 공간 활용과 구조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이 글에서는 건축가로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아파트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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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가치는 평수가 아니라 ‘공간의 질’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집의 가치를 평수나 집값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공간의 디자인, 구조, 그리고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좁은 집이라도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넓게 느껴질 수 있고, 넓은 집이라도 분절된 구조라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공간은 숫자가 아닌 경험의 총합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활동과 기억을 쌓을 수 있느냐가 그 공간의 진정한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고층 아파트, 높이가 주는 심리적 효과는 분명합니다
초고층 아파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층에서 멀리까지 조망이 되는 것을 선호합니다. 왜일까요?
고층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경치는 단순히 풍경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서 시각적으로 더 넓은 공간을 소유하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과 우월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그 공간을 점유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모든 풍경이 나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고층은 공간의 ‘체적’을 더 크게 인식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있습니다. 발코니가 없거나, 고립감이 심해지는 경우, 혹은 엘리베이터 의존도가 높은 구조에서는 도시의 익명성은 유지되지만 인간적인 거리감은 사라지기도 합니다.
발코니 없는 집은 공간이 아니라 ‘박스’입니다
대한민국 아파트에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발코니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발코니는 단순한 실외 공간이 아닙니다. 자연과 접촉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이자, 집 안과 밖을 이어주는 완충지대입니다.
과거의 한옥에서는 사랑방에서 안방을 마주 볼 수 있었습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인지하고 소통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의 아파트 구조는 방마다 벽이 둘러져 있어 방과 방이 서로 단절된 ‘섬’처럼 존재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가족 간의 대화와 소통을 단절시키고, 공간이 심리적으로 좁게 느껴지게 만듭니다. 반대로 방 사이에 창을 만들거나 순환할 수 있는 동선을 확보하면, 그 공간은 심리적으로 더 넓고 풍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벽식 구조는 공간을 고정시키고 변화를 제한합니다
많은 아파트는 벽식 구조로 지어집니다. 이는 방과 방 사이를 벽으로 완전히 고정시켜 구조 변경이 거의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지나도 가구 구성이나 생활 방식이 바뀌었을 때 유연하게 공간을 재구성할 수 없게 됩니다.
유연한 구조를 위해서는 기둥식 구조(라멘 구조)를 도입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월이 지나도 공간을 리모델링하거나 용도에 따라 재배치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오래된 공장 건물이 현재 로프트 형태의 주거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미래에도 유효한 공간은 ‘변형이 가능한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차가 불편한 아파트는 최악입니다
생활하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아파트는 단연 주차 공간이 협소하거나 불편한 곳입니다. 주차 문제는 단순히 자동차를 세우는 공간의 부족을 넘어, 퇴근 후 스트레스, 아침 출근 시 불편함으로 이어집니다.
과거에는 자동차 보급률이 낮아 주차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차량 1인당 보유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에 맞는 주차 공간의 확보는 기본 중의 기본이며, 이를 고려하지 않은 아파트는 생활의 편의를 무시한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평수, 같은 구조… 다양성이 사라진 아파트
현재 대한민국 아파트는 거의 모두가 정형화된 구조입니다. ‘국민 평수’라 불리는 84㎡ 구조를 기반으로 거의 모든 공간이 복제되듯 만들어집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천장이 높은 공간을 원하고, 누군가는 작은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을 선호합니다. 지금은 다양한 삶의 방식에 맞춘 주거 공간이 필요할 때입니다.
건축가가 중심이 되어 마스터 플랜을 설계하고, 동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구조를 만든다면 집값이 평수가 아닌 공간의 디자인에 따라 결정되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공간에 개성과 선택권이 주어져야 진정한 주거 문화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좁은 공간, 심리적으로 넓게 쓰는 방법
공간의 넓이는 반드시 면적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기억을 남기는 공간일수록 더 넓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명은 공간의 심리를 바꾸는 가장 쉬운 수단입니다.
천장에 하나만 있는 주등 대신, 스탠드 조명이나 간접 조명을 활용하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서리나 침대 아래쪽에 조명을 설치하면 모닥불처럼 아늑한 공간이 형성됩니다.
조명이 여러 개일수록 공간은 다양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고, 그만큼 기억에 남는 공간이 됩니다. 실용성과 감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공유 공간, 그리고 공간의 최소화가 초래하는 문제
최근 원룸 중심의 주거 트렌드에서는 공간의 최소화와 함께, 부엌이나 거실 등은 공유 공간으로 대체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합니다.
공유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개인의 사생활과 심리적 안정감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오히려 집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구조는 ‘적은 비용으로 넓은 공간을 누리자’는 명분 아래,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마저 줄여버리는 방향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간은 변화를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는 과거와 다른 시대입니다. 4인 가족 중심의 구조에서 1인 가구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물건의 소유량도 급증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면, 집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처럼 벽으로 칸칸이 나뉜 고정된 구조가 아닌, 용도와 필요에 따라 재구성 가능한 가변형 공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앞으로는 주거 공간에 로봇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전기와 에너지 사용량, 공간의 유연성 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마무리하며
지금의 아파트 구조는 과거의 기술적 한계, 대량 생산의 효율성, 가격 중심의 시장 논리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삶의 질이 중요해지는 시대에서는, 평수나 가격이 아닌 ‘공간의 질과 다양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는 그 공간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용자는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공간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주거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공간은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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